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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
Journal of Environmental Policy and Administration - Vol. 32, No. 4, pp.305-337
ISSN: 1598-835X (Print) 2714-0601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24
Received 11 Nov 2024 Revised 10 Dec 2024 Accepted 26 Dec 2024
DOI: https://doi.org/10.15301/jepa.2024.32.4.305

경제와 여가의 측면에서 바라본 환경

심재명*
*동국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
Environment from the Economic and Leisure Perspective
Jaemyung Shim*

초록

환경문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추구에서 그 근본적 원인은 찾을 수 있다. 통상적으로 사회발전의 척도로서 인식되는 경제성장은 여러 개념적인 그리고 측정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 유한한 물리적 세계에서 영속적인 경제성장은 가능하지도 않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정상상태경제는 환경문제에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한편 성장경제에서 여가는 소비의 영역을 담당함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해 왔다. 정상상태경제는 여가시간이 유의하게 증가하고 소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자율적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여가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으로의 변화가 환경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기반이 될 수 있다.

Abstract

Constant economic growth has been the root cause of the ever-deteriorating environmental problems we face today, and although economic growth is often believed to contribute to increased well-being of our society, it involves several conceptual and measurement-related issues. It is also impossible to perpetuate economic growth in this finite world, and as such, an alternative is a steady-state economy that maintains a fixed level of economy at the ecologically sustainable level. While leisure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our growth-oriented society by representing the primary domain of consumption, it is expected to become a truly autonomous area of life that fosters non-materialistic pursuits in the steady-state society. And environmental issues can only be addressed in such a society.

Keywords:

Environment, Economic Growth, Steady-State Economy, Leisure

키워드:

환경, 경제성장, 정상상태경제, 여가

I. 서론

환경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환경 운동가나 과학자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일상의 주제가 되었다. 환경문제에 대해 언론매체가 하루라도 다루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정도가 되었다. 과거 환경문제가 그저 관념적으로 인식되던 것에 비해 지금 훨씬 더 익숙하고 관심을 갖게 된 주제가 된 것은 그것이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Fournier(2008)가 “우리 모두가 환경론자”(p.529)라고 한 것이 다소 과장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환경이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그런데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가령 환경문제에 대한 대책으로서 정부, 시민단체, 학자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들은 대체로 에너지 절약, 재활용, 일회용품 사용 억제와 같은 개인의 생활 습관의 개선이나 시민의식의 함양—방송 캠페인이나 공익광고가 좋은 사례—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시민 개인의 행동이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온실가스와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종류의 환경 문제는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해온 경제성장, 즉 생산과 소비 증가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경제와 환경의 명백하고 직접적인 인과관계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에 있어 국민의 생활 습관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경제와 환경을 솔직하게 연결 짓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결과 우리는 환경과 경제를 모두 놓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있다. 가령 과거에 한 공영방송 뉴스에 한 경제학자가 환경을 주제로 가진 대담의 사례를 보면, 그는 오늘의 환경문제가 인간의 경제행위 특히 화석연료의 이용의 결과라는 점을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그 대담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지금과 같은 환경 문제들이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우려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반전, 즉 환경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해서 환경문제의 주범인 경제에 대한 우려로 끝나는 이상한 상황은 환경에 관한 우리 사회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환경과 경제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명확치 않은 듯 하다. 양자를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양자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양립가능한 목표로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제를 희생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환경에 대해 고려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양자의 관련성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어떤 문제도 애초에 그 문제를 초래한 마인드를 바꾸지 않고서는 문제해결이 가능하지 않다”(Simms, 2009, p.169)는 지적처럼, 환경의 원인이 경제에 있다면, 경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속이 문제라면, 지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것에 대한 재고를 해보아야지, 여전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채로 과속의 문제를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환경개선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태도는 마치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는 양상을 연상시킨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해 환경의 문제를 경제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이 경제임에도, 막상 환경의 이슈에 직면해 아무도 경제에 대해 직면하지 않는 것은 환경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시급하게 짚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외국에서는 생태경제학이라는 분야에서—대표적으로 Herman Daly를 필두로—이에 대한 논의가 오래전에 제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그러한 논의 자체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문제 제기를 바탕으로 경제성장과 관련된 여러 이슈들과 그 대안의 개념인 정상상태경제(steady-state economy), 그리고 성장경제와 정상상태경제에서의 여가의 의미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러한 고찰을 통해 환경의 문제는 끝없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여가사회가 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본 연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이다.


Ⅱ. 본론

1. 성장 경제

1) 빈곤의 탈피

경제가 인간의 삶에 기여한 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결핍이라는 문제를 해결한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Alfred Marshall (1880)이 경제학에 대해 “인류 대부분이 처한 비참함의 원인에 대한 학문”으로서 “음식과 옷과 주거할 공간이 부족하고, 노동에 혹사당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지치고 근심걱정으로 찌들고, 평온과 여가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조할 기회가 경제학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였다”(Galbraith(1958, p.322)에서 재인용)라고 한 것은, 인간의 삶에서 경제행위가 중요한 영역이 되고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의 사고체계에서 하나의 독립된 형태로 나타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빈곤이 타인과의 비교에 따른 상대적 결핍에 의해 느껴지는 현대인의 여유있는 고통이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과 추위에서 오는 절대적인 고통임을 주지한다면(Galbraith, 1958) 생산을 증가시키고 부를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생산이 증가하고 소득이 증가할수록 끝없는 경제성장과 더 높은 소득을 원하게 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물질에 대한 욕구는 물질이 결핍되었을 때에 크고, 충족이 되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가령,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John Maynard Keynes(2008)는 “손자들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1930년 에세이에서 향후 100년간 생활수준이 4~8배 증가하고 노동시간은 주당 15시간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빈곤의 해결이라고 하는 오랜 목표가 해결되고 나면, 인간은 물질의 추구에서 벗어나 “자유시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가질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절대적 욕구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만족되는 시점에 이르게 되고...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비경제적인 목적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는 할 것이다”(Keynes, 2008, p.21).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긴급한 경제적 필요로부터의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과학과 복리(compound interest)가 가져다준 여가를 어떻게 쓸 것인가와 같은 자신의 진정하고 영원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p.22).

그러나 Keynes가 이러한 예측을 한 시점으로부터 90년 이상이 지난 현재, 하나의 예측은 맞은 반면 다른 하나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부터 2010년까지 80년간 그의 “손주”들이 살고 있는 선진국, 즉 서유럽과 북미/호주의 일인당 실질 GDP가 각각 5.2배, 4.9배 증가한(Bolt, Timmer, and van Zanden, 2014) 반면, 이들의 노동시간은 20세기 중반 주40시간의 표준노동시간이 채택된 이래 지금까지 줄어들지 않고 있다(가령 2022년 현재 OECD 최초 20개국의 풀타임 근로자 평균 주당근로시간은 40.3시간이다(https://stats.oecd.org)). 생활수준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여유 있는 삶을 살리라는,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여가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이 과거 지배적인 예측이었으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1)

요점은, 현재라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소득 증가가 과거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삶의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고 나면 인간은 자유롭게 다른 비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리라는 것이 더 당연하게 여겨진 인간 사회의 발전의 경로였다. 소득의 증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된 후에도 여전히 물질의 생산과 소비가 미덕이 된 것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2) 무한한 욕구: 불포화의 공리

물질의 끝없는 추구가 필연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며 인간은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할수록 행복하다는 불포화의 공리(axiom of insatiability)에 기반한다(Daly, 2005). 경제학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공리주의 철학은 행복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행복을 증가시키는 행위는 도덕적이고, 행복을 축소하는 행위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물질의 풍요는 행복의 근원으로서 간주되었다. 자유시장에서 소비 지출은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며, 개인은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희소한 소득을 사용할 것이므로, 그의 자발적인 소비는 곧 그의 행복의 극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비가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소비는 행복의 대리지표였으며, 생산은 소비자의 행복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가 무한하고 그 무한한 욕구에 대한 자발적인 추구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구가 독립적이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기한 에세이에서 Keynes(2008)가 사회적 상황에 상관없이 발생하는 “절대적 욕구”와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욕구”를 구분한 것은—그리고 이후에 많은 이들이 인간의 고유한 욕구와 인위적 욕구를 구분한 것은(가령 비판이론으로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대표적인데)—그러한 전제가 근거가 없음을 가리킨다. 절대적 욕구가 대부분 충족된 선진국에서는 상대적 욕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지하다시피 타인과의 비교, 모방, 경쟁을 그 심리적 기제로 하는 상대적 욕구는 당연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McKibben, 2002, p.8)는 지적처럼 현대인의 대부분의 욕구가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욕구라기보다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욕구이다. Galbraith(1958)가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 (p.158)라고 부른, 광고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비 욕구를 창출함으로써 소비 욕구가 생산에 의해 추동되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소비가 개인의 자유로운 욕구 표현이라는 모토가 사실이 아니며 소비가 시장의 통제하에 있음을 가리킨다. 자유시장경제가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내세우는 무한한 욕구의 자유로운 추구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인 것이다.

3) 욕구의 동질성의 가정

한편 물질적 욕구의 확대가 사회적 웰빙에 기여한다는 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욕구가 동질하다는 조건이 요구된다. 생산과 소비의 증가가 그에 상응하는 웰빙의 확대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욕구의 증가가 일관되게 웰빙의 증가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의 인용을 보면,

부자가 잠옷(gown)을 한 벌 더 사는 것에서 얻는 만족과 배고픈 사람이 식사 한 끼에서 얻는 만족이 동일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동일하지 않다는 증거도 없다. 이를 검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 욕구는 같은 급으로 취급되어 왔다. 만약 모든 욕구가 동일한 급(equal standing)이라면 어떤 욕구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에 부여되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는 그 사회가 이미 얼마나 부유하건 상관없이 그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Galbraith, 1971, p.266).

위와 같은 지적에 동의한다면 인위적으로 창조되는 욕구를 위한 생산의 증가는 정당화된다. 그러나 과연 잉여의 옷 한 벌이 주는 만족이 배고픔을 해소하는 데서 오는 만족과 같은 등급인가? 사실 Mill(1986)이 즐거움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기까지, 이전의 공리주의는 인간의 즐거움을 동질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전통적으로 경제학 역시 효용에 대한 규범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경제학은 교환된 돈의 가치만을 계산함으로써 그리고 교환된 돈의 가치는 모두 등가라고 가정함으로써 소비의 효용 역시 등가라고 판단한다(Jackson, 2009). 이는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개인의 행복은 그의 “자유로운” 소비와 정비례하는 근거가 된다. 한편 다음의 인용을 보면,

가난한 이의 소득의 증가는 의식주의 보장, 교육, 의료, 안전을 의미하지만, 부자의 소득 증가는 사치품의 증가, 애초에 필요하지 않지만 광고에 의해 유발된 부가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소비의 증가를 의미한다. 요약하면—물론 평균적인 의미에서—가난한 이의 소득 증가는 긴요한 욕구의 만족을 의미하지만 부자의 소득의 증가는 사소한 욕구의 충족을 의미한다(Daly, 1980a, p.14).

위의 인용은 인간의 욕구가 긴요성(urgency)의 차원에서 보다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과 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소득이 증가할수록 소비의 더 많은 부분이 긴요한 절대적 욕구보다는 사소한 상대적 욕구에 기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한계효용의 감소(declining marginal utility)”라는 경제학의 기초 개념은 소비가 늘어날수록 단위 소비 당 효용이 줄어든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를 소득에 적용하면 소득이 증가할수록 소득의 한계효용은 감소하는 것이다(Jackson, 2009).

요약하면, 시장이 부과하는 인위적 욕구의 욕구는 “긴요성”이란 측면에서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업이 희소한 자원을 상품을 생산하는데 뿐만 아니라 그 물건을 광고하는 데에도 투입해야 한다면 애초에 그 물건을 생산한 이유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광고가 없다면 수요가 일어나지 않는 많은 상품들이 가지는 많은 상품의 한계효용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제로이다(Galbraith, 1958). 경제가 성장할수록 경제성장이 가져다주는 개인 그리고 사회 전체의 웰빙의 증가는 점점 둔화된다. 그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

4) 경제성장의 의미: GDP 이슈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이 한 국가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이용되는 것은 경제성장이 그 사회의 웰빙에 기여한다는 막연한 심리적 가정에 근거한다(Mishan, 1980). 그런 이유로서 경제성장을 중요한 국가적 목표로 삼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여러 나라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그러한 웰빙의 지표로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경제성장의 일반적 지표인 GDP(국내총생산, Gross national product)는 간단히 말하면, 특정 기간 동안 한 지역에서 일어난 시장거래를 모두 더한 것으로 정의된다(Jackson, 2009). GDP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좋은 것(wealth)”과 “나쁜 것(illth)”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더한다는 것이다(e.g., Daly, 2013). 회계의 기본 원칙은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함으로써 순수한 수익을 알고자 하는 것인데, 국가회계라고 할 수 있는 GDP는 웰빙에 기여하는 것과 웰빙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을 함께 더하는 매우 이상한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면, 이동 수단인 자동차의 생산은 웰빙의 증가로서 적법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의료서비스나 자동차 수리는 웰빙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GDP에 합산된다. 그 결과 교통사고로 사람이 다치고 자동차가 부서질수록 GDP가 증가한다.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홍수, 태풍,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가 극심해져 건물이나 도로, 개인의 재산이 파괴되어 복구의 필요성이 늘어나는 것은 모두 그 해의 GDP의 일부가 된다. 고통을 웰빙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Jackson(2009)은 “GDP는 경제의 분주함(busy-ness)을 측정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심리적, 사회적 웰빙은 고사하고) 심지어 경제적 웰빙을 나타내는 지표로서도 유용하지 않다”(p.179)라고 온건하게 적고 있지만, 상기한 바를 고려하면 GDP는 유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곡적인 지표이다. Daly(1980b)는 웰빙의 척도로서 GDP를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며, 만약 GDP를 이용해야 한다면 지금처럼 편익과 비용을 더해서 모두 편익으로 정의하는 비논리인 방법이 아니라 편익계정과 비용계정으로 나누어 편익에서 비용을 차감한 순수한 편익을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GDP의 다른 문제는 수입(income)의 산정과 관련된 것으로서, 경제학에서 수입은 정의상 한 지역이 그 해에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그리고 다음 해에도 여전히 같은 양을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최대량을 나타낸다(Hicks, 1946, Daly(2013)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 수입은 미래에도 같은 양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최대 생산과 소비이다. 그러나 GDP는 미래의 수입을 저하하는 자원의 소비를 수입으로서 계산한다. 예를 들어 “숲 전체를 베어서 팔면 그 액수가 그 해의 수입으로 취급된다. ... 정의상 수입은 지속가능하지만 자원의 소모는 그렇지 않다. 회계의 역사는 자원의 부주의한 소비에 따른 빈곤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 국가 회계는 그것을 GDP에 포함시킴으로써 그리고 GDP를 증가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원의 소비를 장려한다”(Daly, 2013, p.22). 요구되는 것은 자원의 소모를 수입으로 계산하는 대신—기업이 자본의 감가상각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국가계정도 자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의 악화를 반영하는 것이다(Stiglitz, 2009, p.2).

GDP가 미래 세대의 웰빙을 담보로 현세대의 욕구를 극대화하는 것은 부채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반복된다. 현대의 시장경제는 부채 기반한 경제로서, “부채는 미래의 수입을 가정하고 그것을 당겨 쓰는 것으로서 미래의 부담이지만 GDP 증가에 반영되고 그럼으로써 장려된다. 부채가 아무 영향도 없는 것처럼 부채가 쌓이는 것을 무시한다. ... 일반적으로 한 사회가 수입(income)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며 사는 것은 미래에 수입 이하로 살아야 함을 의미”(Martenson, 2023, p.82)하지만, GDP는 부채의 이러한 효과를 반영하지 않는다. 미래의 경제가 현재보다 항상 크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부채(투자, 그리고 소비성 부채)를 장려한다.

끝으로, GDP는 시장의 거래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비용—외부성(externality)이라고 부르는—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역시 웰빙을 과장하고 비용을 축소한다(Daly, 2013). 시장에서의 거래가격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지출된 생산비용만을 고려하며 그 상품이 공공에 초래하는 비용을 포함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그 비용은 공공에 전가된다. 탄소 배출이 좋은 사례로서, 상품을 생산하면서 발생한 탄소배출로 인해 치르어야 할 비용—건강, 자연재해와 같은—을 그 상품의 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부담하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주체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자유시장에 대한 오랜 철학적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게 하고 시장을 규제해야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Bruni and Sudgen, 2013).

이처럼 GDP가 여러 문제점을 가진다면, 과연 GDP의 증가가 실제로 우리의 웰빙의 증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GDP가 보여주지 않는 비용이 편익을 초과해 실제로는 웰빙의 감소를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 Daly (2005)는 후자의 경우처럼 경제성장이 웰빙보다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는 것을 “비경제적 성장(uneconomic growth)“(p.100)이라고 부르고,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경제성장이 비경제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경제성장이 경제적 성장인지 아니면 비경제성장인지를 나타내주는 지표는 없다. 경제적 성장에서 비경제적 성장으로 넘어가는, 즉 성장의 한계 비용이 성장의 한계효용을 초과하는 티핑포인트에 대한 거시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시경제는 개인이나 기업의 행위의 최적의 수준에 대해 다루지만, 경제 전체를 다루는 거시경제이론에는 “언제 멈출 것인가”와 같은 규칙이 없다(Daly, 2005, p.112). 영구적인 성장은 경제학의 디폴트의 가정이다.

5) 영구적 경제성장의 불가능성

설사 경제성장이 상기한 비판들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영속적인 경제성장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한 마디로 지구라는 물리적으로 유한한 세계에서 경제가 무한히 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과 소비라는 인간의 경제행위가 절대적으로 지구의 물리적 환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에는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경제학 교재의 표준적인 도표는 경제를 “생산과 소비가 완전히 닫힌 계에서 시계추의 운동처럼 영속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으로서 묘사한다. ... 경제가 물리적 환경에 연결되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경제학에서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경제는 [닫힌 계 안에서] 완벽하게 순환적이고 자기자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Georgescu-Roegen, 1980, p.49). 경제가 지구라는 커다란 물리적 세계에 속한 하나의 하위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는 동떨어진 독립적 영역으로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구적인 경제성장의 불가능을 최초로 지적한 것이 경제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이었는데, 이는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경제행위를 추상적인 화폐의 흐름으로서 이해하였다면, 물리학자들은 경제를 실질적인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서 이해하였다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Daly, 1980a).

물리학은 열역학법칙의 관점에서 경제가 물리적 세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먼저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물질-에너지(matter- energy)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인간은 그 무엇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으며, 부의 유일한 근원은 자연이다. “생산”이라는 단어는 마치 인간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인간은 진공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미 100여년 전에 Alfred Marshall(1920)의 경제학 원론(Principles of economics)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Victor(1980)에서 재인용).

인간은 물질을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의 노력은 필요에 맞도록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형태, 배열을 바꾸는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새로운 효용을 제공하도록 물질을 재배열하는 것 그 이상 아니다. 소비는 그것을 다시 파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p.199).

현대 문명과 생활 수준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지적 능력, 창의성, 모험심, 끈기와 노력, 기술발전과 같은 인간의 능력들은 모두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에 관련된 것들이지, 어느 하나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또한 물질-에너지는 인간의 목적에 맞게 변형되고 소비되면서 폐열, 분진, 연기, 쓰레기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것처럼, 유를 무로 돌릴 수 없다. 경제의 관점에서 자연은 자원을 제공하는 창고이며 폐기물을 수거하는 배후지(sink)이다. 경제는 그 창고 그리고 배후지보다 커질 수 없다.

한편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물질-에너지는 비가역적으로 분산한다. 열역학 2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불리는데, 본논문의 목적상 엔트로피는 “열이 분산된 정도”(폴 센, 2021, p.127), “이용가능하지 않은 에너지의 양”(Georgescu-Roegen, 1980, p.51)2)이라는 개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3) 열은 항상 높은 것에서 낮은 방향으로 흐르고 한번 그렇게 분산된 열은 다시 뜨거워지지 않는다. 그 변화는 비가역적이며 재순환될 수 없다. 이를 엔트로피로써 표현하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며, 그것은—외부의 개입이 없다면—되돌릴 수 없다. 폴 센(2021)은 열의 차이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물리학이 경제에 기여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물리계에 온도 차이가 존재할 때 열에서 유용한 일을 추출할 수 있다. 쇠막대의 한쪽 끝이 뜨겁고 반대쪽 끝이 차가우면 타고 흐르는 열을 이용해 짐을 들어 올리는 등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쇠막대 전체가 균일한 온도에 도달하면 막대에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해도 더 이상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다(p.419).

위의 인용이 가리키는 것은, 석유 한 방울, 석탄 한 조각에 농축되어 있는 낮은 엔트로피의 열에너지는 이용할 수 있지만, 햇볕에 의해 따뜻해진 공기 혹은 바닷물에 들어있는 방대한 그러나 높은 엔트로피의 균일한 에너지는 이용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는 농축된 형태로 존재하며 즉각적으로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게 하지만, 낮은 밀도의 태양광은 에너지로서 이용하기 어렵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이용 가치가 없으나, 저수지에 비축된 물은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열과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연상해보면 된다(Georgescu-Roegen, 1980).

한편 열이나 운동에너지를 얻기 위해 화석연료를 태우면 그 열은 주변과 균형을 이룰 때까지 분산되고 인간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형태로 흐트러진다. 인간의 경제행위를 순전히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지구의 낮은 엔트로피의 가치 있는 자원을 높은 엔트로피의 폐기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Georgescu-Roegen, 1980). 지난 200년간의 과학기술 발전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 과정을 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학기술이 아무리 혁신적이더라도 높은 엔트로피를 낮은 엔트로피로 되돌리거나 재순환할 수 없다. 어디에선가 그러한 과정—가령 열의 농축, 혹은 재활용—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더 큰 엔트로피의 증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자연의 계산에는 공짜가 없다.

이처럼 경제성장은 그동안 인간과 가축의 근력에만 의존하던 생산이 저엔트로피의 풍부한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게 됨에 따라 가능해진 것이었다. 특히 값싸고 풍부한 화석연료는—Georgescu-Roegen(1980)가 자연이 인류에게 가져온 지참금이라고 묘사한 것처럼—생산과 소비의 폭증을 가능하게 하였다. Martenson(2023)이 “개솔린 1갤론이 인간 노동 몇백 시간에 맞먹는 일을 한다. 200시간만 잡더라도 시간당 $20의 임금을 고려하면 개솔린 가격은 지금의 갤런당 $4이 아니라 그 천 배인 $4,000이 되어야 한다”(p.252)라고 묘사한 것처럼, 현대인의 풍족한 생활수준은 과거 같으면 200명의 노예가 1시간 동안 필요하였을 일을 불과 1갤론의 액체가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현대의 생활방식은 이처럼 자연이 준 선물의 결과이다.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기하급수적 증가라는 특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Martenson, 2023). 매년 경제가 몇 퍼센트 성장한다고 표현할 때 갖기 쉬운 착시현상은 그것을 선형의 증가로서 인식하는 것이지만, 경제성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가폭이 커지는 기하급수적 증가이다. 특히 특정 시점을 지나면서 지나면서 증가폭이 급격히 가속화되는 “꺾인 그래프”의 모습을 보인다. 가령 100년간 매년 평균 5% 증가한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100번째 되는 해의 1년치 증가분은 첫 40년의 증가폭을 넘어선다. 그러나 마지막 해의 이 가파른 상승은 5%라는 숫자에 가려 잘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선형(linear)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비선형의 기하급수적 증가가 보편적이다. 중요한 것은 기하급수적인 증가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Martenson, 2023, p.24).

한편 성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온 반면, 성장에 요구되는 자원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오고 있다. 더구나 자원을 얻는데 있어 자연스러운 특징은 가장 질이 좋은 것, 가장 접근성이 좋은 것을 먼저 취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질이 떨어지고 채굴하기 어려운 것이 남는다는 것이다(e.g., Martenson, 2023).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를 예로 들면, 품질 좋고 지표면에 가까운 유전은 점점 적어지고 지금은 2천 미터 이상의 해저나 북극과 같이 점점 채굴에 많은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 곳에서 석유를 얻고 있다. 그 결과 1930년대에는 100의 석유를 얻는데 1만큼의 석유가 소비되어 그 비율이 100:1이었다면, 1970년에는 25:1, 1990년대에는 18:1~10:1, 그리고 2010년 이후는 순에너지율이 3:1로 추정되고 있다(Martenson, 2023). Delannoy, Longaretti, Murphy, and Prados(2021)는 그 비율이 2050년까지 1:1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이 의미하는 것은 채굴되는 석유와 채굴하는데 소비되는 석유의 양이 같다는 것으로서, 석유가 더 이상 경제적 자원으로서 의미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순에너지에 대한 통계는 없으며 총산출량에만 관심을 가진다. 더 중요한 현실은 이러한 패턴이 석유 뿐 아니라 모든 비재생광물자원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기하급수적 변화는 창고로서의 자연 뿐 아니라 배후지로서의 자연에도 해당된다. 자연이 흡수하고 동화해야 하는 폐기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왔음은 물론이다.

상기한 바가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미 임계점을 넘은 것으로 보이는 현재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성장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목표인 것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은—지구가 커지지 않는 한—그야말로 모순어법이다(Daly and Townsend, 1993).

성장론자들의 입장은 궁극적인 자원은 인간의 창의성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므로 경제성장에 한계는 없다는 것이다. 자원이 고갈되면 대체 자원을 개발하고, 또 공해 문제도 법과 제도를 더 엄격하게 만드는 등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의성과 노력은 열역학의 첫째 법칙과 둘째 법칙을 우회하는 방법을 발명할 수 없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고, 폐기 물질을 사라지게 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되돌릴 수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인간이 이룬 성취가 너무나 대단하고 경탄할 만한 것이어서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으나, 인간의 존재의 조건에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비가역적인 낮은 엔트로피에 인간의 효용이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리고 생명유지기능을 하는 자연환경에 고엔트로피의 처리를 의존해야 하는 냉정한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Georgescu-Roegen, 1980).

2. 정상상태경제(Steady-state economy)

영구적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면, 종국에는 새로운 경제형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성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50여년 전인 1972년 이미 “성장의 한계”라는 로마클럽 보고서(메도우즈, 1972)에서 제시되었고,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저명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John Stuart Mill이 경제발전의 마지막 지점으로서 “정상상태 경제(stationary-state economy)”를 상정하였다.4) 그는 부유한 국가들이 곧 정상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각 나라들이 처한 여러 발전단계들은 모두 정상상태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보았다(Mill, 1986). 물고기가 물을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성장경제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현재의 방식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인간의 긴 역사에서 화석연료 기반의 100년도 안되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며, 인간 역사 대부분은 소위 정상상태경제였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화 이전의 시대가 기술적 제약에 의한 것이었다면, 다음에 기술하고자 하는 정장상태경제가 자연의 물리적 제약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1) 정상상태경제의 정의

정상상태경제란 자연의 수용력 안에서 경제 규모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좀 더 기술적으로 표현하면 가능한한 낮은 스루풋(throughput)에 의해 일정한 규모로 유지되는 경제(Daly, 1980a)를 의미한다.

경제 규모는 인구수에 일인당 생산을 곱한 것으로서 정의된다. 만약 경제규모가 일정하게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인구의 증가는 일인당 생활수준의 감소를, 반대로 일인당 생활수준의 증가는 인구의 감소를 의미한다. 환경문제에 책임이 큰 선진국들은 그동안 경제성장에 있어 생산의 증가가 더 주요하게 작동해왔으므로, 정상상태경제를 이야기할 때 인구보다 생활수준의 고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e.g., Jackson, 2009).

그런데 인구와 인간이 생산한 물질은 늘 일정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죽고, 물건은 소모되고 낡아서 폐기된다. 따라서 인구와 물질량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와 새로 생산되는 상품(생산재와 소비재를 포함하는)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경제규모가 일정하다는 것은 그 시스템으로부터 유출되는 인구, 물질과 동일한 만큼 새로운 인구, 물질이 유입됨을 의미한다.

정상상태경제의 정의의 다른 구성개념인 “스루풋”은 인구와 물질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질-에너지의 흐름을 가리킨다. 자연의 원천으로부터 시작해 인간의 경제를 거쳐 다시 자연의 싱크로 빠져나가는, 저엔트로피에서 고엔트로피로의 물리적 흐름으로서(Daly, 1980b) 경제를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정상상태경제의 정의에서 언급한 “가능한 한 낮은 스루풋에 의해 유지되는 경제”란 일정 수준의 경제규모를 유지함에 있어 최소의 물질-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출생율과 높은 사망률보다 낮은 출생율과 낮은 사망률로써 인구가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똑같은 개념이 자본, 내구재 및 소비재에도 적용된다. 높은 콸리티, 내구성이 높은 상품의 느린 흐름이 낮은 콸리티, 수명이 짧은 상품의 빠른 흐름보다 바람직하다”(Czech and Daly, 2004, p.600). 생태적 임계점 아래에서 낮게 유지되는 지속가능한 스루풋이 정상상태경제의 핵심 조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장경제는 높은 스루풋을 선호한다. 상품의 잦은 교체와 폐기는 생산의 필요성을 지속시키며 소득의 증가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 현대의 기술은 얼마든지 물건의 내구성을 증가시킬 수 있고, 새 물건으로 교체하는 것보다 수리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소득과 일자리의 창출에 불리하고 경제성장에 기여하지 않는다. 현대의 운영방식에 보편적인 “계획된 노후화”는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단축시키고 상품의 사이클을 가속화하는 높은 스루풋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방식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떠오르는 질문은 물질의 양과 스루풋(물질의 흐름) 중 어느 것이 효용에 더 중요한가라는 것이다(Daly, 1980b).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루풋은 소득을, 물질량은 자산을 가리킨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즉 효용을 제공하는 것이 현금의 흐름인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양인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실제 사용을 통해 필요를 충족하는 것은 숫자가 적혀 있는 종이가 아니라 실재하는 물건이다. 후자가 효용의 양을 결정한다. 물론 소득이 시장에서 물건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지만, 효용을 얻는데 물건이 빈번히 교체될 필요는 없다(물론 물건의 빈번한 교체는 새로움(novelty), 과시와 같은 특별한 종류의 효용에는 기여할 것이다). 높은 스루풋을 통한 소득의 증가는 높은 환경비용—사회적 비용은 물론이고—을 동반하고 그것은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비효용(disutility)을 증가시켜 순효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성장경제가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는 생산이라기보다 소득과 일자리의 보장을 위한 생산, 한마디로 말하면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하는 경제라면, 정상상태경제는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인간의 실질적 필요에 봉사하는 생산 본연의 기능을 중시하는 경제이다.

3. 성장경제의 한 축으로서의 여가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 즉 환경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끝없는 경제성장의 추구에 있으며 그러므로 환경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경제성장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 대해 지금까지 논의하였다. 환경이 무한한 생산증가라는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야기되었다고 한다면 그 절반인 소비의 영역을 빼놓을 수 없다. 다음에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성장경제 사회에서의 여가를 소비의 영역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자동차왕으로 알려진 Henry Ford가 자신의 공장노동자들에게 자동차를 소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최초로 자신의 공장에 토요일 휴무 즉 주5일 근로제를 도입한 사건은 생산이 일의 영역이라면 소비는 여가의 영역임을 가리키는 좋은 사례이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역할을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분할 수 있다면, 그와 등치로서 삶의 영역을 크게 일과 여가로 구분할 수 있다. 성장경제와 정상상태경제의 여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며, 후자야말로 진정한 여가사회라는 것이 다음에 주장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1) 소비의 장으로서의 여가

현대사회에서 여가는 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흔히 일 혹은 기타 의무를 다하고 남는 시간으로 정의된다. 여가가 일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시간 혹은 자유시간에 일어나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이 필요에 의한 강제의 영역이라면 여가는 일시적으로 그러한 강제에서 벗어난 자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가 심리학에 따르면 여가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유로움의 인지(perceived freedom)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나 상황을 사람들은 가장 많이 여가로서 경험한다(Mannell and Kleiber, 1999).

여가를 정의함에 있어 자유의 인지라는 심리적 개념을 중시하는 이유는 행위로써 여가를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가 행위가 천차만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예를 들면 TV를 보거나,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운동을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통상적으로 여가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들이지만 그 행위의 동기나 내용의 면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동일한 행위를 놓고 보더라도 그것을 일괄적으로 여가라고 부를 수 없는데, 가령 영화를 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가행위지만 영화종사자나 영화평론가에게는 일이 될 수가 있다.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같은 행위가 다르게 경험될 수 있다. 주말에 친구와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과 아이를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라는 동일한 행위임에도 전자는 즐거운 여가행위일 수가 있고 후자는 부모의 의무로서 경험될 수 있다. 또한 일이 즐거워서 한다면 일도 놀이처럼 경험할 수도 있다. 이상에서 기술한 것들은 여가란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위에서 예로서 언급한 TV 보기, 친구와 어울리기, 운동, 자원봉사와 같이 동기와 내용에 있어 매우 이질적인 행위들을 모두 여가행위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공통 요소는 그것들이 모두 행위당사자의 자발적인 선택, 자유로움의 인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가를 정의할 때 그 핵심적인 속성은 자유이다.

흥미롭게도 경제학자들은 소비에 자유라는 콸리티를 부여해왔다(Mishan, 1967). 새롭고 다양한 상품을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삶의 질이 증가했다고 느끼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자유의 하나다. 사실 자유라는 주제—가령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자유—는 철학적 혹은 정치적으로 심오한 주제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경험하는 자유는 선택의 자유, 특히 소비와 관련된 선택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Schor(1993)가 “소비는 개인의 자유이며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고, 그것을 방해할 근거가 없고 해서도 안 되었다”(p.133)라고 지적한 것은 현대인들이 가장 빈번하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행사하는 자유는 실제로 소비의 자유라는 것—가령 어떤 물건을 살지, 외식을 어디에서 할지, 여행은 어디로 갈지 등등—을 가리키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이 직장에서 생산자의 역할을 수행할 때 그는 자유롭지 않지만, 여가 시간에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앞의 장에서도 기술한 것처럼 소비가 따르지 않는 생산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소비를 필수적으로 이끌어 내야 원활하게 작동하는 성장경제에서 과연 소비가 진정한 개인의 자유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인가라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있다. 현대인이 소비를 하면서 누린다고 생각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면 자유라는 모습으로 성장경제의 한 축을 강요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먼저, 소비가 곧 행복한 삶이라는 시장경제의 관념은 소비 이외에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실제로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소비가 행복의 지배적인 조건이 될 때 사람들은 소비 이외에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기회를 찾기 어렵게 된다. 현대의 시장경제가 인간의 행복을 경제적 효용이란 단일한 척도로 상정함으로써 시장 밖에서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가 제공할 수 있는 행복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Atkinson, 2009) 행복을 소비로 축소함으로써 비물질적인 행복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가 성장경제의 경제적 구조에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인의 욕구의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원인을 전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과연 개인의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인지 확인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Schor, 2000).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을 물질적인 것에 돌림으로써 소비가 곧 행복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진정으로 독자적이고 자발적이기는 쉽지 않다. 자유의 선택지를 오로지 시장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실은 속박이다.

또한 소비가 노동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함으로써 노동에의 의존을 증가시키고 궁극적으로 경제시스템을 더 굳건하게 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Schor(1999)가 현대인의 삶을 “일과 소비의 굴레work-and-spend cycle”라고 간명하게 표현한 것은 소비와 노동이 서로 의존하는 순환의 고리임을 가리킨다. 서구사회에서 여가가 소수의 특권에서 소위 대중여가의 사회로 전환되는 시기에 사회엘리트들이 이를 환영하기보다 우려한 것은 여가가 노동윤리를 침식함으로써 산업의 발달을 저해하리라는 것에 기인하였는데, 소비에의 강박이 노동의 동기를 더욱 강화하고 대중을 더 충실한 노동자로 만듦으로써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Cross, 1993; Schor, 1999). 박선권(2005)이 실업에 대한 언급에서 “실업은 자유시간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한편 돈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경험”(p.176)이라고 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여가가 일을 전제로 하며 자유는 소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함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소위 자유의 영역이라고 하는 여가가 노동의 가치를 강화시킴으로써 사실은 자유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성장경제사회의 동력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끝으로 소비 자체에서 현대사회의 소비가 자유보다는 속박을 강화하는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국민 대부분의 절대적 욕구가 충족되고, 소비의 동기와 만족이 사회적 맥락에서 결정되는 상대적 욕구가 주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소비는 절대로 자유로운 경험이 될 수 없다. 소비가 자족이 아닌 비교와 모방과 경쟁의 동기에 지배당하는 한 사회가 아무리 부유해지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은 언제나 존재한다(Rojek, 2010). 소득의 계층사다리에서 모든 이의 상대적 위치를 상승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가 주도적인 경제의 패러다임이 된 이후 부가 소수에 집중되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방향으로 경제적 상황이 전개되어 온 것을 고려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그러한 박탈감은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소비가 만족보다는 불만족을 자극하는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도 현대 소비의 특성이다(Mishan, 1967). 소비자 만족이라는 모토 아래에 주기적으로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들은 기존의 상품들에 대한 불만의 창조를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가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만 이윤의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Blauwhof, 2012, p.257)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폐기하는 것이 현대 자유시장의 생존방식임을 가리킨다. “계획된 진부화”가 상품의 설계에 들어가고 상품의 생명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것은 그러한 생존방식의 반영이다. 성장의 사회는 바꿔 말하면 “버리는 사회”의 동의어로서(Jackson, 2009, p.97) 그 기저의 사회심리적 작동원리는 영속적인 불만족이다. 또한 소비자를 끊임없이 상품의 선택에 직면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끝없이 갖게 만든다(Rojek, 2010). 이 역시 소비가 끊임없는 의심과 불안의 원천이 되게 한다. 이는 소비가 자유로운 행복의 추구라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요약하면 생산이 본연의 목적을 잃고 생산을 위한 생산이 된 것처럼 소비 역시 삶에 꼭 필요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위라는 본연의 모습을 잃었다. 그것은 현재의 제도가 생산의 공간인 일터 뿐만 아니라 여가에서도 경제를 추동하는 동력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2) 정상상태경제에서의 여가

성장경제에서 여가가 소비의 영역을 담당함으로써 경제의 한 축을 차지하였다면, 정상상태경제에서 여가는 경제로부터 독립된, 진정으로 자유롭게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영역이 될 것이다. 2000년대 초 주5일, 주40시간 근로제가 도입되고 또 소득의 꾸준한 증가 덕분에 여가 지출이 증가하면서 대중매체나 학술문헌에 여가사회가 도래하였다는 표현이 상투적으로 등장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가가 소비로 축소된 가짜 여가사회이다. 다음에 살펴볼 것처럼, 정상상태경제의 사회야말로 진정한 여가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상상태경제에서는 여가시간의 유의한 증가가 일어날 것이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물질-에너지의 흐름(스루풋)을 최소화하며 일정의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물건의 내구성과 수명이 증가해 생산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필연적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들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의미하는 노동시간의 감소는 실업이 증가해서—그리고 여전히 일부는 과잉노동에 시달리면서—생기는 것이 아닌 사회 전반의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노동시간의 감소를 가리킨다. 생산량이 자라지 않는 경제에서 거시경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을 나누는 방식으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Jackson, 2009).

또한 정상상태경제에서도 생산기술의 발전은 계속될 것이고, 그것은 여가시간의 증가가 지속적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과거 많은 이들이—앞에서 인용한 Keynes를 포함해—생산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그 예측이 빗나간 것은, 생산성 향상의 결과가 여가의 증가보다 소득의 증가라는 형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일정하게 유지됨을 전제로 하는 정상상태사회에서 생산성 향상이 생산의 증가(즉 소득의 증가)로 나타나는 것은 모순이므로, 기술발전에 따른 미래의 생산성 향상은 온전하게 여가시간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경제행위의 감소를 경제침체(recession)라고 표현하는 기존 성장경제의 사고방식에서 이는 당연히 우려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이미 부유한 사회의 생산이 많은 부분 필요(needs)보다 잉여의 욕구(wants)를 대상으로 하고, 실질적 필요보다 소득과 일자리 창출이 중요한 고려요인이 되고, 또 그것이 스루풋을 극대화하는 반환경적인 생산을 통해 충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상상태경제의 생산 감소가 인간의 웰빙의 저하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작금의 환경문제가 생산의 한계비용이 그 한계효용보다 커지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면, 생산의 감소는 웰빙의 순증가를 의미한다. 또 상품 소비에서 오는 행복은 비교와 경쟁을 통한 상대적 행복이지만 시간의 소비—관계, 참여, 배움, 문화, 봉사 등 진정으로 개인의 자발적 선택으로 이뤄지는—에서 오는 행복은 덜 상대적이기 때문에 소비의 풍요보다 시간의 풍요가 진정한 웰빙의 원천이 될 수 있다(Gull, 1995).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차치하더라도, 노동이 효용(즐거움)보다는 비효용(고통)으로 정의되는 현실에서,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노동 환경을 좀 더 만족스럽게 만드는 것이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노동시간의 감소는 그 자체로서 행복한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건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상상태경제는 여가시간의 증가와 더불어 여가행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성장경제사회에서의 소비로서의 여가 혹은 상업화된 여가에 대한 주요 비판은 가장 자율적이어야 할 여가시간마저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Daly(1980a)가 성장경제에서 상품집약적인 행위가 장려되고 시간집약적인 행위가 억제된다고 지적한 것은 성장의 사회가 이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큰 행위를 중시하는 경향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GDP 이슈의 하나는 그것이 시장에서 거래된 생산 행위만을 고려하며 가사노동, 보살핌, 자원봉사와 같은 시장 밖에서 일어난 생산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Stuart, Gunderson, and Petersen, 2020). 정상상태경제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역전될 것이다. Atkinson(2009)은 “만약 63세의 사람이 손주나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직업을 그만둔다면 그 행위는 거시경제적으로 폐해가 된다. 그가 직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돈을 주고 돌봄 제공자를 고용한다면 그것은 거시경제적으로 유용하다”(p.800)라고 쓰면서 왜 잠재적으로 더 보람 있고, 의미 있고, 즐거울 수 있는 일이 현대의 경제에서는 장려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제학이 답해야 할 오래된 윤리적 질문이다.

“소비적인 일/생산적인 여가(Consuming work/productive leisure)”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Chaplin(1999)은 런던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프랑스 농촌의 세컨홈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집을 꾸미고 수리하는 등 자급자족하는 휴가를 보내는 것을 관찰하고 여가가 소비로부터 단절될 때 어떻게 생산적 행위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아이의 공부를 부모가 돌봐주거나 텃밭에서 야채를 직접 재배하거나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는 등, 성장경제에서는 시장에 의존하던 행위들이 여가시간이 증가하는 정상상태경제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이를 학원에 맡기거나 야채와 커피를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여가가 소비가 아니라 자기주도적인 생산의 영역이 될 때에 그것은 인간에 유해한 산업노동의 일부를 대체하는 만족도 높은 대안이 될 수 있다. Farina(1974)가 현실적으로 유용하지만 긴급성의 측면에서는 우선순위가 덜한 생산 행위를 “여유로운 노동(leisurely labor)”(p.151)이라고 칭하고 그것을 바람직한 여가로 간주한 바 있다. 정상상태경제에서는 그러한 여가가 두드러진 여가의 모습이 될 수 있다.

한편 여가의 생산적인 측면은 그 실용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Jackson(2009)이 “성장 없는 번영(Prosperity without growth)”이라는 책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 이상의 것이라고 정의하고, “주변 사람과 애정을 주고 받고, 동료의 존중을 얻고, 사회에 유용한 일을 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공동체를 신뢰하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잘 산다는 것의 중요한 요소는 사회의 삶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p.36)이라고 적고 있는데 여가는 그러한 삶을 더 가능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수동적인 소비에서 능동적인 참여로 여가의 모습이 전환될 것이다.

한마디로 정상상태경제의 이상과 여가사회의 이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상상태경제는 19세기 John Stuart Mill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는 정상상태 경제를 물질적 효용과 비물질적 즐거움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최대화되는 제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아직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물질적 웰빙에 높은 가중치를 주어야 하는 반면, 물질적 부가 일정 수준을 넘는 부유한 사회는 정신적 웰빙에 높은 가중치를 줌으로써, 행복의 총량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에게 정상상태경제는 삶에 필요한 물질적 수준이 충분히 갖추어지고 나면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이 함양되는, 그것이 행복의 근원이 되는 그런 사회였다(Buckley, 2011). 그의 공리주의는 즐거움의 동질함을 상정하던 이전의 공리주의와 달리 인간이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추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질적인 극대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였다(Buckley, 2011).

[Mill에 의하면] 높은 등급의 즐거움은 사람들이 여가와 부를 충분히 즐긴다는 조건에서 얻어질 수 있다. 그것은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 인간(character)이 되는데 중요한 조건이다. 만약에 성장이 전반적인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가정 하에 성장정책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정책은 약간의 물질적 즐거움을 얻는 댓가로 여가와 같은 조건을 희생시키고 그럼으로써 부지불식간에 행복을 저하시킬 수 있다(Buckley, 2011, p.145).
생산의 증가는 후진국에서만 여전히 중요한 목표가 된다. 발전된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 나은 분배이다. ... 충분한 여가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삶을 더 고상하게 만드는데 힘쓸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조건은 정상상태경제와 양립할 뿐 아니라 정상상태경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 정상상태가 인간의 발전(improvement)의 중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종류의 정신적 문화와 도덕적, 사회적 발전의 공간이 열릴 것이다. 정신이 생존의 기술(art of getting on)에 몰두하기를 멈출 때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향상될 것이다(Mill, 1986, pp.320-321).

상기한 사회적 비전들이 여가철학의 비전과 다르지 않다. 여가학이 종종 그 뿌리로서 언급하는 고대 그리스의 여가의 고전적 의미는 여가를 도덕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데, 현대적 맥락에서 Fain(1991)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가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가가 도덕적인 행위인 것은 그것이 자유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그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자유의 행사는 그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따라서 자유와 가치관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가치관이란 본질적으로 좋은 삶이 무엇인가, 좋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ought to)와 같은 질문을 포함한다. 이는 자유가 책임의 영역까지 포함함을 의미한다. 즉 여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선택하는 자유이다(Fain, 1991, 저자 요약).

여가사회로서의 정상상태경제가 본질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가치관의 변화이다. 노동이 삶에서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고 삶의 구조를 결정하는, 그리고 남는 시간은 소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삶에서 벗어나 노동의 비중이 줄어들고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정상상태경제는 진정한 여가사회라고 할 수 있다. 환경의 이슈로 돌아가, 현재의 환경문제가 근본적으로 기존의 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에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진정한 여가사회로의 변화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노동윤리가 산업 물질문명을 떠받쳐 왔듯, 정상상태경제 역시 새로운 규범을 필요로 한다. 여가윤리는 정상상태경제를 떠받치는 훌륭한 규범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여가는 가장 친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미덕이다.


Ⅲ. 결론

환경의 문제가 끝없는 경제성장의 추구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결국 물질 중심의 삶의 방식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은 결국 우리의 생활방식을 전환하는 노력이며 그것은 사회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Jackson(2009)이 경제성장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미쳤거나 이상주의자거나 혁명주의자”(p.14)라고 한 것은 경제성장에 대한 거의 신앙에 가까운 태도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상황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에서 환경문제를 경제성장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성장, ESG과 같은 귀에 익숙한 슬로건들은 환경문제를 현재 성장경제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예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시장경제는 성장을 전제로 하는 경제제도라는 점에서 환경문제는 현재의 경제방식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문제이며 그러므로 환경위기는 현재의 제도의 논리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Fournier, 2008; Magdoff and Foster, 2011). 현재의 경제방식이 그동안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한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과학기술을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장경제의 패러다임에서 가장 그럴듯한, 그리고 유일하게 의존할 만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기술 발달은 환경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제본스의 역설(Jeavons’ paradox)이나 반등효과(rebound effect)와 같은 용어들이 가리키듯 기술발전이 가져온 효율성 개선은 늘 자원의 총사용량의 증가에 의해 상쇄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그 기술을 어떤 패러다임에서 이용하는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Mishan(1967)이 자동차에 비유해 말하였듯, 좋은 기술이 좋은 성능의 엔진을 만들어 줄 수 있지만, 그 자동차가 향하는 목적지가 올바르지 않다면 좋은 성능의 엔진은 잘못된 곳으로 빨리 가게 할 뿐이다.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잘하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니다.

패러다임은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질문을 가질 때에 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행복”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변화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반면 경제는 수단의 영역이고 경제학은 수단의 학문이다(Daly, 1980a). 경제가 행복을 정의할 수 없다. 행복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수단의 영역인 경제의 역할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경제의 논리로 내려간다면 패러다임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목적이 수단을 결정하는 것이지 수단이 목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제도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은 삶의 물리적인 모습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서 더 중요하게 찾을 수 있다. “현대의 시장경제를 진정으로 강력하게 만든 힘은 그것이 삶의 물질적 조건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고 사람들은 무의식속에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Appblebaum, 1992, p.575). “우리가 자라면서 동화되고 사회화되는 것이 자본주의 윤리, 태도, 그리고 사고방식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이 사회에 바람직하다고 배운다(Magdoff and Foster, 2011, p.37).” 이처럼 공고한 성장경제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는 당연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Galbraith(1958)가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인식 혹은 가치는 그것을 다른 인식이나 신념으로써 설득하는 것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더 이상 그러한 통념(conventional wisdom)을 지지하지 않을 때 바뀐다고 지적한 것은 현 상황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인간의 경제가 자연의 물리적 한계에 다다라 점점 더 심각한 어려움들을 드러내고, 자연이 그 필수적인 기능인 생명지원기능을 상실해 우리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선택의 여지 없이 패러다임의 변화는 시작될 수밖에 없다.

희망적인 것은 그 패러다임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더 행복한 삶을 가져오는데 기여하리라는 것이다. 과거 한 비중 있는 시사방송인이 경제 침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경제성장이 멈추는 것을 마치 사회가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는데 Daly(2013)는 이러한 시각이 오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상상태경제는 “성장 없는 발전(development without growth)”이지 발전이 멈추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인프라, 시설, 장비, 도구, 그리고 각종 소비재들은 계속 소모되고 교체될 것이고, 과학기술은 계속 향상되고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고 소유하는 것들은 양적으로 늘어나지는 않지만 질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양적 성장의 요구로부터 해방된 시간과 인간의 에너지는 정신적, 문화적인 분야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과거 인간의 많은 업적과 성취는 정신이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황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성장경제 사회에서 주로 오락과 휴식을 위한 소비를 통해 전사회적 스트레스 관리 역할을 해주던 여가는 훨씬 더 의미있는 삶의 영역이 될 것이다.

환경문제가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끝없는 경제성장과 소득증가가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은 경제가 인간을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던, 생산과 소비가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19세기의 멘탈리티에서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Schor and Taylor, 2002).5) 작금의 환경문제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얼만큼이면 충분한가라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맺음말로서 적절할 듯하다.

지속가능한 [정상상태경제]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 경제학자, 정치인, 유권자들로부터의 엄청난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그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끝없이 성장하는 경제는 생물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나에게 정치적 불가능함과 생물물리학적(biophysical) 불가능함 중 어떤 것에 대항할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더 불가능한 후자보다 전자에 맞서는 모험을 할 것이다(Daly, 2005, p.102).

Notes

1) 소득이 꾸준히 증가해온 현재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케인즈가 향후 100년간 소득의 증가를 예측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러한 예측을 하는 것은 두 개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 1차대전 이래 성장이 매우 느렸고—성장과는 거리가 먼, 사실상 1인당 소득이 약간 감소함—또 그가 이 에세이를 쓴 대공황의 시기는 낙관적인 예측을 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둘째 그 당시 경제학자들은 성장에 대해 예측을 할 이론적으로 튼튼한 수단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 현재의 경제학자들이 아는 성장이론이 193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Pecchi & Piga, 2008). 반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근로시간이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고려하면, 근로시간의 감소는 오히려 예측하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많은 지식인들이—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도—근로시간의 파격적인 감소와 대중여가시대의 도래를 예측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를 가리킨다.
2) Georgescu-Roegen(1980)는 엔트로피에 대해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용가능하지 않은 에너지의 양”으로 정의하면 전문가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더라도 일반적인 목적에서는 더 적합하다고 적고 있다.
3) 엔트로피는 물질-에너지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물질의 구성성분의 고유한 배열이 주변과 만날 때 그 고유한 구조적 특성을 잃고 주변과 같아지는 것을 무질서한 정도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엔트로피를 열에 국한해 정의하였으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가역적 현상에 적용된다. 가령 철이 산소와 수증기와 결합해 녹이 되는 현상 역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이다. 철이 가진 고유한 분자 배열이 주변의 물질과 만나면서 철의 고유한 구조가 저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기체에도 적용된다. 가령 사과는 튼튼한 분자 구조를 가진 엔트로피가 낮은 물질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산소와 물과 결합해 썩으면서 무질서한 구조가 된다. 즉 엔트로피의 증가는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하며,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고 그 변화는 비가역적이다.
4) 인구와 자본스톡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제를 의미하는 말로서 고전경제학자들은 stationary-state라는 용어를 썼으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소비자의 취향과 생산기술이 변하지 않으면서 인구와 자본스톡이 증가할 수 있는 경제를 나타내기 위해 그 용어를 씀으로써 용어의 혼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Daly는 “steady state”라는 단어를 물리학과 생물학으로부터 차용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경제학자들이 인구와 자본이 특정 비율로 일정하게 성장하는 성장 모델을 의미하기 위해 steady-state라는 용어를 씀에 따라 혼동의 여지가 남아 있다.
5) 또한 여기에는 기득권의 이해라는 문제가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별개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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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 2004년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여가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5년부터 동국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관심분야는 일과 여가, 여가심리, 여가철학 등이다(jxs653@dongguk.ac.kr).